책임감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전 솔직히 제가 책임감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있었어요.
자소서에 '책임감'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흔한 지도 모르고, 빼놓지 않고 욱여 넣었습니다.
내 강점이 무엇일까 고민해봤을 때 정말 책임감인 것 같았거든요.
매일 새벽에 일어나 이른 아침을 준비하는 엄마, 그 이른 아침을 드시고 출근해 저녁 늦게 퇴근하시는 아빠를 보고 자란 저는
저 역시 학교 생활에서도, 직장 생활에서도 지각이란 걸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악명 높은 대학 시절 팀 프로젝트, 동아리 활동에서도 항상 팀을 이끌어가는 쪽이었지
남이 밤새가며 쌓은 탑에 손가락만 툭 걸쳐놓는 얌생이가 된 적은 없었어요.
동기들이 너는 정말 '다르다'라는 말을 할 때면 괜히 어깨가 으쓱거리곤 했습니다.
언젠가 첫 직장생활을 하던 중, 외주를 맡았던 적이 있습니다.
회사에서 선배가 그랬던 것 처럼, 미팅에 10분 일찍 들어와 준비하고, 클라이언트께 다양하게 준비한 작업안들을 선보이며 일정을 논할 때면
'나 좀 프로페셔널한 책임감 있는 사회인이 된 것 같은데..!!!'하는 기분에 도취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전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난 책임감이 뛰어난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살았습니다.
근데 작년인가, 또 다른 직장에서의 마무리를 하며 동료들과 서로에 대한 한 해 덕담 겸 후기들을 나눌 때였습니다.
저에 대한 차례가 돌아왔을 때, 이상하게도 책임감이라는 단어는 잘 나오지 않더라구요.
그 땐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그 때부터였나, 나의 '책임감'에 대해 의식하게 된 것 같습니다.
올해 저는 결정을 할 일들이 많았습니다.
개인적인 진로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회사에서 가장 빈번했습니다.
사수가 없는 환경에서 내가 이 분야의 (상대적으로, 아무튼 직무상) 가장 전문가였습니다.
그러니까 결정은 온전히 제 몫이었어요.
처음에는 짜릿했습니다. 저에게 이정도의 권한이 주어지고 제가 실험해보고 싶은대로 해보고 싶은 대로 다 해볼 수 있었습니다.
주변에 떠들고 다녔습니다. "나 스타트업 체질인가봐~~ 완전 잘 맞나봐~~"

결정을 한다는 건 그 결정을 실현해내는 과정까지 품는다 것을 전..정말.. 몰랐습니다...!!
여러 정책들과 고객들의 성향, 비즈니스적 목표들을 고려해 여러 선택지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데,
저는 결정의 순간에 항상 모르겠다는 말로 대표님께 선택을 넘겨버린다던가(대표님이 최종의사결정권자니까 당연한거 아냐?라는 핑계를 대며)
개발자들의 일정이 짧다며 내뱉는 볼멘소리와 그들을 설득하는 일도
고민이 길어지며 일정 산출에도 매번 실패하며 일정을 미뤄지게 한다던가,
미뤄지는 개발 일정에도 그 이유를 파악하고 개발자님들과 일정 협의를 보는 등
난 아직 일개 신입이니까..하고 악역의 일은 다 대표님께 넘겨버렸던 것 같습니다.
도저히 돌파구를 모르겠어서 대충 미뤄둔 채 잊어버린 화면이 그대로 개발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을 때, 내가 대충 해놨다는 사실을 들키기 싫어서 외면 한다던가
동작하긴 하지만 의도대로 완벽하게 동작하는 건 아니라서 개발자분께 수정을 요청드릴만한 명분이 부족할 때도 다
'리소스가 부족하니까'라는 무적의 논리로 회피했었답니다.
그와중에 시니어 개발자분께서 주간 회의 때면 이거 이렇게 바꾸면 일정 '책임'은 누가 질 거냐며 말 하는 모습에 스타트업스럽지 않지 않나 속으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너무 폐급같나요...? ㅠㅠ '인턴'이니까 봐주십쇼.................................)
그러다 국내 대기업 서비스 기획자분께서 해주는 직무특강을 들었습니다.
무덤덤하게 그 직무가 뭘 하고 뭘 신경쓰는지 TTTTT스럽게 알맹이만 말해주시는 그 분이 좀 멋있었습니다.
N사 들어가려면 명문대 나와야 하냐, 관련 전공해야하냐, 포폴이 몇 장이어야 하냐, 어떤 프로젝트가 중요하냐, pdf가 중요하냐~ 취준생 입장에서 불안감에 궁금할 수도 있지만 사실 본질이 아닌 질문들을 단호하게 쳐내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무례하진 않게)

근데 다음장에 제 찡찡대는 질문이 나왔는데요, 그의 직구타를 보고 웃고 있었는데 사실 그건 저에게도 날라오는 것이었습니다.
Q: B2B라서 고려해야할 정책들이 너무 많아서 얼렁뚱땅 산으로 가게 된다. 또 B2B라서 즉각적인 실적으로 연결시키는 게 너무 어려운 것 같다.
A: ....(한 껏 더 차가워진 말투로) 비법 없어요. 정책 그거 다 정리해야죠. 본인이 정책 다 안보고 하니까 얼렁뚱땅 산으로 가는 거죠. B2B라서 실적? 어렵다? 이게 무슨소린지 모르겠네요.
...핑계대지 마세요.(이것까지 말씀은 안하셨지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렇다고 저는 들음)
진짜 한 대 후두려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그간 B2B니, 사수없는 환경이니, 중요한 순간에만 환경탓, 상황탓, 핑계로 책임은 유보해왔다는 사실이 느껴지더라구요.
어렴풋하게 느꼈지만 애써 회피해왔던 사실이 수면위로 쑥 올라왔습니다.
"책임 없는 쾌락"만 누렸구나.

저는 그간 '내가 생각하는 대로 결정'만 누렸지 그 결정을 실행해내는 과정, 결과는 책임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일정이 어떻게 되던, 결과물 품질이 어떻게 되던
스타트업 리소스는 부족해라는 핑계로 결과물 품질을 대충 넘기려고 했습니다.
제가 내린 결정 중 잘 안된 결과는 외면하려 하고 잘 된 결정만 취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조직에서의 '책임'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책임 진다는 것은 뭘까?
정치인이 어떤 사고가 나면 '책임지고 사임하겠다' 기업에서도 큰 사고가 생기면 헤드가 '책임지고 사임하겠다'라고 말합니다.
혹은 대표가 나와서 인사하며 적극 보상방안을 검토하겠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책임은 결정을 내림과 동시에 과정뿐만 아니라 그 끝을 끌어앉는 일이었습니다.

어떤 결정으로 인해 불이 났다면 어떻게든 그 불을 꺼야 하는 사람인 셈입니다.
한 몸 희생해 끄던, 소화기를 구해오던, 불 잘 끄는 사람을 불러오던,
어떻게든 불을 꺼뜨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회사에서의 어떤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그것이 잘 만들어지고 있는지, 그 과정에서 팀원들이 일하는데 문제는 없는지,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 어떤걸 포기해야할 지 아니면 일정을 연기해야할 지, 결과물이 의도대로 개발됐는지, 안됐다면 되도록 신경쓰는 것을 뜻합니다.
'에라 누군가 신경쓰겠지~ 이렇게 저렇게 하면 대충 알아서 잘 딱 해주시겠지? 대충 상황보고 파악하시겠지?' 라는 마인드로 넘기면 아무도 챙기는 사람 없이 실수들은 스노우볼이 되어 나에게로 굴러오게 되어 있더라구요.
내가 잘 못한 부분은 빠르게 인정하고 결과를 위해 쪽팔리고 미안하고 이런거 다 쳐내야 합니다.
개발자가 한심하게 여긴다거나 개발자한테 미안해서 이런거 없습니다.
책임져야 합니다. 어떻게든.
이제 회사에서 일한지 6개월이 다 되어가고, 세번째 (빅)프로젝트에서는 리드를 맡게 되었습니다.
첫 다짐으로는 어떤 성과를 내어 포트폴리오 한 챕터 만드는 게 목표였는데, 성과는 개뿔.. 어떻게 시간이 흘러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6개월의 성과라고 하면, 이제껏 나는 '책임감'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성과!
수동적으로 일정을 수행하는 것은 굳이 말하면 성실함이지 책임감이 아니었습니다.
내년은 책임감을 더 수행할 수 있길 바라며. ..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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